식탐 종생기: 시샤모 대신 냉동 저급 열빙어가 담백할 수 있는 이유 Discover

8시 30분에 출근한다. 일은 재미 없다. 이제껏 해온 것과 같은 카테고리의 일 중 가장 단순한 노무직이다. 비유하자면 공장 같은 곳에서 조립을 하거나, 미싱을 돌리는 일이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 단 5분의 마진도 없이 나가고, 돌아와 앉아있어야 한다. 퇴근은 6시지만 이미 녹초가 되어 있으므로 딱히 의욕적인 일이란 할 수 없다. 한 달이 지났다.

마지막 회사생활 후 1년 가까이 집을 사무실 삼아 프리랜스로 일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끼니는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화학조미료를 굳이 쓰지 않고,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재료를 고르지 않았다. 맛이나 룩, 레시피의 정통성은 전혀 보장할 수 없겠지만 음식다운 음식을 해먹으며 살았다. 재료 맛이 나지, 양념 맛이 나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면 스팸이 맛이 없어지고, 외식이 어지간해서는 다 맛이 없다. '술안주'라는 면죄부가 있을 때나 좀 후진 음식도 기꺼이 먹었지, 이건 이래서 불성실한 음식이고 이건 이렇게 해서 글러먹은 음식이라느니 공부하며 입맛만 까다로워져 스스로가 피곤할 지경이었다. 

점심은 시간 제약이 있기 때문에 줄을 20분을 서야 하는 구내식당에서 먹는다. 뭔가 맛난 걸 먹고 싶어서 나갈 시간 여유가 없거니와, 밖에 나가서 먹는 것도 시도는 해보았지만 오피스가의 식당들이라는 것이 맛이나 질이 빤하므로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돈만 아까웠다. 구내식당에서 '호텔 출신 조리사'(설거지만 했어도 호텔 출신은 호텔 출신이지)가 짰다는 식단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 먹는다. 제주올레국수, 쌀국수, 오야코동 같은 '특식' 메뉴도 자주 나오지만 어차피 뭘 먹으나 맛은 다 똑같다. 한 사흘 만에 점심을 포기했다.

거의 칼퇴하고 있으므로 저녁은 좀 다를 줄 알았지만 입맛은 무섭다. 저열한 점심밥에 길들여진 입맛은 이상한 것을 찾고, 만족해버린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맛의 극치가 올라간 것이다. 허나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자극적인 것만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음식물 쓰레기 같아서 입에도 대지 않았던 체인 감자탕집 냉동 해장국이 맛있다니, 순식간의 변화다. 그와 비슷한 음식물 쓰레기 수준의 음식들이 맛있다. 점심처럼 바쁘게 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서, 그나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메뉴를 먹어서 그저 맛있다. 이것저것 이상한 음식이 먹고 싶은 것이 많을지는 몰라도 그 맛이 다 똑같을 것을 미리 알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즐겁지 않다.

내게는 굉장히 좌절스러운 일이다. 식탐이 죽어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종생기다. 그리고 동시에 공감에 대한 고백과 사과다.

블로그에서 '담백하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그 음식의 맛을 상상해보면 '짜지 않고, 맵지 않고, 재료 본연의 단 맛이 이끌어져 나온' 맛이다. 이를테면 샤브샤브의 배추 같은 것. 담백한 게 아니라 달달한 것인데 다들 담백하다고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담백하다는 개념을 오용하고 있는 당신들 모두를 누군가들과 함께 뒤에서 엄청나게 비웃었다. 

이젠 왜 그들이 그 맛을 담백하다고 느끼는지 알게 되었다. 점심에 먹은 강렬한 음식물 쓰레기 음식보다는 강하지 않은 맛이라면 어지간해서는 다 담백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무 데나 때려 넣는 물엿, 설탕의 단맛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재료의 단맛이 정당한 단맛이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게 될 것임을, 그리고 몇 달 안에 나 또한 그렇게 느끼게 될 것임을 안다.

금요일 밤 한 후배는 동네 이자카야에서 시샤모를 먹으며 행복해 했다. 담백한 맛이 난다며 좋아했다. 거기에 대고 "그건 시샤모가 아니라 북미대륙에서 온 싸구려 열빙어고 담백한 게 아니라 고소하고 짭짤 달달한 맛"이라고 말해줘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배에게 그 생선구이는 틀림없는 시샤모였을 것이다. 그것이 비유와 상징으로서의 시샤모라 한들, 죽어버린 식탐과 미각이 느끼는 것이 시샤모라면, 그건 시샤모로서 인정 받아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가 있다.

주말이라 집에서 밥을 해먹었다. 소금과 올리브유만 뿌린 신선한 야채와 소금과 후추만으로 잘 구운 살코기 스테이크 같은 것이 먹고 싶어진다. 그런 것이 아직은 맛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음식이 맛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괜찮지만, 곧 맛을 모르게 될 것이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식탐이 절망스럽다. 식탐을 탐구할 마음이 더이상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게선 팔팔하게 날뛰던 정직하고도 정당한 탐욕이 죽어간다. 음식 같지 않은 것을 먹으면서도 퇴근을 감사해 하고 저녁의 여유를 망극하게 여기게 되면 그런 것도 맛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맛(없는)집에서 말도 안되는 음식을 먹은 그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블로그를 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곧 이 블로그를 더 할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때쯤 되면 스스로는 문제의식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 것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냉면이 맛없게 느껴질 것이라 생각하면 많이 슬프다 :0

<이미지 출처: 구글 검색>

덧글

  • 번사이드 2013/01/28 01:13 #

    사실 살펴보면 조미료 덜 쓰는 가게들이 주변에 몇몇 있습니다. 가격대가 어중간하거나 가격에 비해 구성이 평범해 개인적으로 소개하지 않는 곳도 있구요.
    황모씨 표현대로 그런 가게들은 방송을 타지못하면 조만간 문을 닫거나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실정이죠. 전 '월강부산돼지국밥'만 해도 조미료 적어서 가끔 즐깁니다. 돌아다니다 보면 대박은 절대 못치고 조미료 적게 쓰며 그럭저럭 버티는 데가 있습니다. 올해는 그런데 여럿 찾을겁니다~
  • naut 2013/04/05 11:22 #

    누군가와 같이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고집 부리기도 쉽지 않더라고요(미각 파괴 완료)
  • 종이책 2013/01/28 14:51 #

    아 씨 너무 슬프잖아요 음식밸리에 이런 슬픈 글을 올리는 미역님 규탄한다
  • naut 2013/04/05 11:21 #

    규탄당했었네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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